(들어가며..) 오래전부터 전시에 있어 글을 작품과 나란한 무게로 다룰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시는 대개 익숙한 절차와 관습 속에서 만들어지고,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읽히지 않거나, 버려지거나, 구겨지거나, 무시되곤 하는 낱장의 서문을 생각했다. 1층에는 반투명한 캠핑 현장에 맞춰 서문의 일부 단어를 투명하게 삭제했고, 2층에는 빼곡함을 고려하여 작가와 작품, 과거를 세세하게 읽어내는 긴 글을 비치했다.

1. 살다 보니

《웨이포인트: 서울/방콕》(이하《웨이포인트》)은 류민수와 정우빈의 2인전이다. 이 둘은 2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시기를 함께 보낸 친구이자, 전시를 만들며 미술 현장에서 각자의 일을 이어가고 있는 동료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두 사람의 생활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류민수는 현재 서울에 머물며 자신의 생활 기반을 이어가고 있고, 정우빈은 태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고 있다. 삶의 일부를 공유해왔던 두 사람의 일상은 점차 변화했고, 이 변화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번 전시의 시작이다. 전시 제목인 ‘웨이포인트’ (Waypoint)도 이 맥락을 함축한다. 웨이포인트는 경유지라는 뜻으로 류민수와 정우빈의 작업이 전시장이라는 특정한 교차점에서 만나 잠시 머물고, 다시 각자의 방향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가리킨다. 부제 ‘서울’과 ‘방콕’은 두 작가가 활동하거나 생활의 기반을 두고 있는 실제 장소이다. 이번 전시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서 출발하지만, 그 시선은 곧 자신 바깥으로 번져 나간다. 한 사람을 이루는 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응축되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오며 겪은 관계와 압박, 실패와 유예, 머물고 싶음과 떠나고 싶음 사이의 긴장, 그리고 일반적인 삶의 경로로는 포섭되지 않는 특수한 경험의 축적이다. 이 전시는 이렇듯 쉽게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자신과 그 삶을 되돌아본다. 자신의 주변인을 불러 모으고, 나를 둘러싼 기대와 요구가 어떻게 작동해 왔는지를 되짚으며, 두 작가는 작업을 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2. 함께 있음이 실패할 자리 

2.1. V.F에 관하여
류민수는 가상의 캠핑 현장인 〈V.F〉를 만든다. 작년 가을 옥상에서 동료 작가들과 바비큐 파티를 하며 경험했던,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들과 환경을 다시 불러오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시도는 2025년 개인전 《그리기 위한 조각》에서 공개했던 〈Radius〉(도판 1.)와도 연결된다. 〈Radius〉에서 류민수는 직접 제작한 미술 석고상을 중심에 두고, 입시 미술학원의 구조를 재현하듯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모여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원형의 대열을 만들었다. 이때 원형은 하나의 중심을 둘러싸고 임시로 머무를 수 있도록 설정된 반경이었다. 〈V.F〉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조가 반복된다. 다만〈Radius〉에서 석고상이 사람들을 모으는 중심이었다면, 〈V.F〉에선 모닥불이 그 중심의 역할을 이어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온기를 제공하지 않는 불이며, 주변의 인물들 역시 실제 몸을 갖지 못한 채 그 주위를 둘러싼다. 류민수의 가상은 3D 프린팅, 홈캠, 전화, 전선과 같은 기술적 매개를 통해 조각적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의 작업은 조각적 상황을 완성하기 위한 조각들을 모으는 행위에 가깝다. 〈V.F〉는 가족, 친구, 지인의 몸을 스캔한 뒤, 그 표면을 3D 프린팅하여 반투명한 외피로 옮긴다. 이들은 실제로 전시장에 모이지 않지만, 형상은 출력된 외피로, 시선은 홈캠으로, 목소리는 통화 장치를 거쳐 연결된다. 프린팅된 몸은 표면만을 남긴 채 비어 있고, 홈캠은 전시장의 상황을 전달하지만 흐릿하고 일방적인 시선만을 허락한다. 기술은 함께 있을 수 있는 환경을 일부 제공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그 한계도 확인시킨다. 경험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신의 몸을 통해 성립하는 것이라면 그의 작업 방식은 바로 그 몸이 삭제된 상태를 드러낸다. 

1) 〈V.F〉는 작가가 만든 알파벳 조합으로, ‘Virtual Fire’의 약자이자 ‘가상의 불꽃’을 뜻한다. 류민수는 VR의 몰입감과 그로 인한 단절감을 함께 떠올리며 제목을 구상했고, 이는 작가가 말한 “함께하지만 단절되어 있는” 작업의 상태와 맞닿아 있다. 

(도판 1.)〈Radius〉, 2025, 석고상, 이젤, 종이, 간이의자, 가변 크기.

2.2. 반경과 ‘구체적인 보편성’
    류민수는 ‘나’에서 출발해, 나와 조금은 가깝지만, 또 다른 나, 또는 조금 더 먼 나, 그리고 나의 주변으로 관계의 반경을 넓혀간다. 그런 점에서 〈V.F〉는 류민수가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관계의 반경과 모임의 불가능성을 다른 방식으로 확장한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의 반경은 〈V.F〉에서 작가-작품, 작품-관객 그리고 주변인이라는 관계 항을 놓고 볼 수 있다. 〈V.F〉는 누구도 안정적인 위치에 머물지 못하는 조각적 상황을 보여준다. 작가는 작품 제작자이며,〈V.F〉가 작동하도록 연결 상태를 확인하고 유지하는 개입자로 등장한다. 그는 두상에 설치된 홈캠과 전선, 장치의 상태를 점검하며 이 가상의 캠핑 현장을 유지한다. 이처럼 작가는 조각적 상황 안팎의 경계에 놓인 존재로 남는다. 관객 역시 〈V.F〉에 온전히 초대된 상대는 아니다. 통화 중인 작가는 관객을 향하지 않고, 홈캠의 응시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V.F〉에서 관계는 연결되면서도 어긋나고, 모두를 초대하는 듯 보이지만 끝내 완전히 포함되지 않는다. 이 불안정한 관계 구조는 작가의 구체적인 주변인들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V.F〉의 보편성은 모두에게 같은 이야기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특수한 사례가 실패하는 자리, 즉 함께 있음이 온전히 성립하지 못하는 순간에 드러난다. 류민수는 자신과 가까운 인물들을 호출하지만, 이들은 보편적 인간의 사례가 아니라 그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구체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로 이 구체적인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는 장면에서 오늘날 관계가 얼마나 쉽게 분리되며 어긋나는지가 드러 난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 1949~)이 말하는 ‘구체적인 보편성’(concrete universality)’ 역시 이런 지점에서 참조될 수 있다. 보편성은 추상적인 공통점이 아니라, 특정한 삶의 예외와 실패를 통해 드러 난다. 그런 의미에서 〈V.F〉의 불가능한 모임은 작가의 사적 관계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 함께 있음의 조건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장면이 된다.

2.3.실패를 붙잡는 질문들
    이 보편성은 다시 실패의 문제로 이어진다. 작가가 만든 불가능한 모임은 사적 관계의 문제이면서 ‘구체적인 보편성’의 단편이 될 수 있다. 류민수의 〈V.F〉은 바로 이 모순적인 조건, 즉 함께 있음이 성립하지 못하는 특수한 실패의 장면을 빈 외피, 들리지 않는 목소리, 계속해서 확인해야 하는 연결 상태로 강조한다. 이러한 점에서 류민수의 가상 캠핑장은 공동체의 성공적인 재현이 아니라, 함께 있음이 실패하는 방식의 재현에 가깝다. 여기서 실패는 실패할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 혹은 끝내 모르는 척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그 실패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 누구와 함께 있고, 혹은 누구를 잃었으며,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한편으로 실패를 반복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 질문에 답을 낼 수 있을까? 

2)  지젝에게 구체적 보편성은 특수자들의 공통 속성에서 추출되는 중립적 보편성이 아니라, 보편자가 자신의 특수한 내용들과 맺는 부정적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보편성이다. 그는 보편성이 특수한 사례들 속에서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현의 실패와 균열을 통해 구체화된다고 본다.

3. 증명되지 않은 삶을 꺼내는 일 

3.1. 태국에서의 정우빈
정우빈은 이번 전시에서 태국에서 생활하며 그려온 일상의 장면들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이는 기존 작업과는 다른 면모를 드러내는 일로, 작가는 전시를 함에 있어 스스로에게 용기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오래 망설여온 삶의 방향을 더 이상 유예하지 않고 “생각해 왔던 대로 살아보겠다”라는 선택이다. 용기라는 말은 언제나 동일한 무게로 주어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용기는 증명되지 않은 상태를 감수하는 용기에 가깝다. 따라서 〈태국〉시리즈는 삶과 작업이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그가 이 작업을 쉽게 꺼내지 못했던 이유는 단지 이전 작업과 결이 달라 보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회가 승인하는 경로와 무엇이 정상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에서 비켜난 삶의 시간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의 문제에 가깝다. 정우빈은 2023년 처음 태국으로 떠난 뒤 그곳에 생활의 기반을 만들었고, 이후 한국과 태국을 오가며 살아왔다. 이때 이동과 정착의 과정은 한국에서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삶의 방식과 태국에서 새롭게 만들어가는 생활 사이의 차이를 통과하는 일이었다. 그 사이에서 작가는 사회가 어떤 삶을 납득 가능한 것으로 승인하는지, 그리고 그 바깥의 삶을 왜 쉽게 실패로 돌려세우는지를 되묻게 된다. 

3)  정우빈은 〈태국〉 시리즈를 새로운 장소의 기록이 아니라, 관계, 담론, 기록, 경력, 비교와 조급함 속에서 외면해온 자신을 다시 마주하고 작업의 출발점으로 돌아가기 위한 “작은 용기의 실천”이라고 설명한다. 이때의 용기는 이미 외부 요인에 의해 만들어진 성취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작업 자체에 다시 집중하기 위해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들을 드러내는 선택에 가깝다. 

3.2. 어디에 있든, 내가 무엇을 하든
  이때 삶의 기준은 가족이 기대하는 삶, 사회가 요구하는 안정, 작가로서 응당 쌓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경력, 그리고 미술 현장에서 반복되는 조언과 충고의 형태로 구체화한다. “이렇게 그리면 안 된다.”, “이런 작업을 보여주면 안 된다.”, “지금은 이런 작품을 할 때가 아니다”라는 말들은 때로 조언처럼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의 삶과 작업을 이미 승인된 방향안으로 흡수하려는 압력이 되기도 한다. 이때 압력의 핵심은 그런 말과 교육, 미디어에서 노출된 성취와 안정이 마치 약속된 것처럼 제시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그 약속이 끊임없이 지연되거나 충돌한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개인은 여전히 자신의 성실함과 자기 통제력,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방황이나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이 압력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묻기보다, 자신이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지, 조언에 어떻게 자신을 맞출지 먼저 계산하게 된다. 개인은 자신이 가진 능력, 성실함, 잠재력, 선택의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규칙 안에서 입증하도록 훈련받는다. 증명의 굴레로 들어가는 순간, 실패 역시 개인의 몫으로 귀속된다. 상황 자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지워지고, “내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라는 식으로 자신을 책망한다. 이렇게 발생하는 불안과 실패감은 자기 증명과 경쟁을 생존의 기본 조건처럼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사회 하에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인 압력으로 남는다. 특히 작가의 삶은 이 구조와 쉽게 겹친다. 작가는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선택이 방황이나 실패가 아니라 다른 하나의 방향임을 반복해서 설득해야 한다. 대부분은 자신을 성공한 사람, 특정 궤도에 도달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삶을 포기한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정우빈의 〈태국〉시리즈는 그의 삶이 성공과 실패로 쉽게 정리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바로 그 중간 상태가 그를 끊임없는 증명의 자리로 불러낸다.
3.3. 자화상을 그린 후에
  그런 의미에서〈태국〉 시리즈는 정우빈에게 그 요구와 증명이 자신 안에서 어떻게 작동해 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조언과 충고, 비교와 기대 속에서 작가를 특정한 방향으로 밀어 넣었다면, 태국에서의 시간은 그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타지에 있을 때도 몸에 남은 습관, 불안, 증명, 강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태국〉시리즈는 자신이 선택했지만 여전히 흔들리는 마음, 떠났지만 완전히 벗어나지 못함을 품고 있다. 태국의 풍경과 사물, 사람을 그린 이 그림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이루는 존재들이며, 하나의 일관된 자아로 정리되지 않는 복수의 마음들이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그림은 그동안 쉽게 드러내지 못했던 삶의 장면들을 전면으로 끌어낸다. 그것은 스스로를 해명하거나 증명하기보다, 전시라는 형식을 빌려 말하지 못했던 삶을 꺼내 보이는 하나의 시도에 가깝다. 또한 찡쪽(จิ้งจก), 녹이앙(นกเอี้ยง), 아쑨(อสูร) 등 동일한 장면을 여러 번 그리는 행위도 자신을 이루는 것을 다각도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정우빈에게 태국은 처음으로 나가본 외국이자, 곧바로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은 장소이다.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 속에서 그는 적응의 어려움, 언어로 인한 단절감, 외로움과 서글픔을 느꼈고, 이러한 감정을 태국에서 마주한 풍경과 장면에 자연스럽게 이입시켰다. 정우빈은 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 도마뱀인 찡쪽을 〈2마리의 찡쪽〉(도판 2.)과〈1마리만 남은 찡쪽〉(도판 3.)으로 그려내며 함께 있음과 홀로 남겨짐 사이의 변화를 이야기한다.(도판 2.)  한편 태국 신화 속 아수라 적 존재인 아쑨은 하나의 고정된 형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모티프인 아쑨은 하나의 개념이지만 색감과 묘사의 차이를 통해 여러 방식으로 그려지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반복된다. (도판 4. )〈태국〉 시리즈에서 반복과 변주는 낯선 장소에서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것뿐 아니라 작가로서 하나의 정체성이나 스타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없음과도 연결할 수 있다. 작가는 입시와 대학 교육을 거치며 하나의 스타일, 일관된 양식, 소위 ‘작가다운’ 태도를 요구받아 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태국〉 시리즈에서 그는 그러한 요구에 순응하기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이미지들 역시 모두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이를 보여준다. 따라서 〈태국〉 시리즈는 여러 모습으로 드러나는 자기 자신을 대변하는 작업이다.

(도판 2.) 〈2마리의 찡쪽〉, 2023, 천에 유채, 47.8 × 56.9cm (사진 제공: 정우빈)

(도판 3.)〈1마리만 남은 찡쪽〉, 2023, 천에 유채, 47.8 × 56.9cm (사진 제공: 정우빈)

(도판 4.)〈아쑨〉 시리즈 (사진 제공: 정우빈)

이 전시장은 그간 말하지 않았던 개인적인 ‘나’의 이야기이자 ‘나’를 이루었던 주변의 존재로 이루어진, 결국 자화상과 같은 공간이다. 누구에게나 쉽게 말하지 못한 삶의 일부가 있다. 그것은 대단한 비밀이라기보다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거나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전시 기간 작가는 방문자에게 1:1 대화를 요청한다. 이 대화는 일기에 가깝고, 부탁에 가깝다. 작가는 〈태국〉 시리즈가 인쇄된 휴지 한 장을 관람객에게 건네며, 태국에서는 휴지가 소중한 물건이라고 설명한다. 이 사소한 물건은 우스꽝스럽고 민망하며, 동시에 자신과 밀접한 존재이다. 그는 배설, 위생, 습관, 문화적 차이, 바뀌지 않는 자기 자신이 이 휴지에 겹친다고 말한다. 이 대화는 자신이 작업을 해오는 동안 자신도 몰랐던 언어와 경로를 찾고 싶다고 했던 그의 말과 이어진다. 이는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고자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어떤 부탁으로 읽히기도 한다.  

4.  삶과 여행 사이의 웨이포인트

두 작가의 작업에서는 여행과 삶이라는 단어가 서로 교차한다. 류민수는 찰나의 따뜻한 시간을 〈V.F〉로 옮기며, 일상에서 잠시 벗어났던 순간의 온기를 다시 불러오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여행(캠핑)의 설렘을 재현한다기보다, 이미 식어버린 불씨를 다시 살려보려는 안간힘에 가깝다. 이때 삶과 여행이 갖는 이질적인 시간은 서로 겹친다. 《웨이포인트》를 보러 온 사람 중 대부분에게 태국은 여행지일 것이다. 반면 정우빈에게 태국은 도망치듯 떠난 끝에 도착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가족이 있는 집이다. 여행과 삶은 지금 당장 내 앞에 놓인 것과 더 멀리 놓인 것 사이의 거리에서 갈라진다. 목표를 이루지 못했거나, 거절당할지 두려워하거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까 노심초사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여행은 잠시 다른 곳에 놓일 수 있으리라는 해방감의 약속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행이 삶이 되거나, 삶이 여행이 되거나, 결국 그 둘이 이도 저도 아니게 희미해져 버릴 때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웨이포인트》는 바로 그런 희미함 속에서의 돌아봄을 말한다. 류민수와 정우빈이 만든 사적이고 특수한 장면들이 실패하거나 어긋나는 순간, 오늘날 관계와 삶을 지탱하는 보편성이 함께 드러난다. 한 사람은 함께 있음이 실패할 자리를 계속 점검하고, 다른 한 사람은 외부에 의해 정해진 삶의 기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되돌아본다. 이들의 작업은 삶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이 계속해서 흔들리고 어긋나는 과정 안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전시는 하나의 나로 수렴되지 않는 삶, 정해진 경로에서 자꾸 벗어나는 인생, 그리고 그렇게 흔들리면서도 다른 시간을 기대하게 되는 마음을 보여준다. 《웨이포인트》는 오늘을 살아간다는 일이 얼마나 쉽게 설명될 수 없는지를 드러낸다. 산다는 건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여러 갈래의 마음이 남아 있는 곳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