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자신을 안정적으로 보존할 수 없는 시대를 지나는 듯하다. 우리를 지탱하던 구조가 녹아내린 자리에서 생존은 개인의 몫이 되고 보장될 수 없는 지속가능성은 우리를 불안케 한다. 본래 산다는 것은 여러 모습의 변화를 전제하지만, 오늘날의 삶은 자신을 보존하지 못한 채 다른 모습으로의 변화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전의 나를 버려야 할 때를 마주한다. 이는 개별적이거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모습과 여러 몸을 거쳐야만 하는 오늘날의 삶과 맞닿아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단일한 모습이 아니라 다수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본 전시는 이러한 상황-다양한 모습과 여러 몸을 거쳐야 하는-에서 변화에 있어 자신을 폐기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자신이 유지되는 변형(메타모르포시스)과 자신이 소거되는 변화 이미지
이러한 버려짐은 ‘각자도생’과 ‘적자생존’1 이라는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주변을 단절한 채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받는 과정에서 단 하나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을 낳기도 한다. 그런데 이 불안은 필연적일까? 식물이 생장하는 모습은 이 질문에 대해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식물은 뿌리를 내린 채 이동하지 못하는 존재로 여겨지지만 그 부동성은 정지 상태와 동일하지 않다. 식물은 한 자리에 머물며 잎과 줄기를 생산하고, 사방으로 확장하며,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 살아간다. 앞선 의미로의 연속성은 ‘각자도생’과 ‘적자생존’의 논리와는 다른 형식으로의 변신이 나를 보존하며 살아남을 수 있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메타모르포시스(Metamorphosis)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변태, 변신, 변모로 번역되는 이 개념은 동일한 정체성을 고정한 채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 이행하는 생명의 기술을 의미한다. 에마누엘레 코치아(Emanuele Coccia, 1976~)에 따르면 메타모르포시스는 서로 다른 두 상태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는 우리가 고정된 채 존재할 수 없으며, 타자와 완전히 분리되거나 완전히 동화될 수도 없는 상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변신. 변신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이야기로 전해졌다.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B.C.17~ A.D.18)의『변신이야기』속 다프네(Δάφνη) , 그리고 한강(1970~)의 『내 여자의 열매』에 등장하는 여성은 인간과 식물이 결합된 존재로 나타난다.2 이들은 자신이면서도 동시에 이질적인 존재인 식물의 모습으로 변신하며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드러낸다. 변신은 서로 다른 존재가 겹쳐지고 교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운동이며 자신이 다른 형태로 이어지는 생의 지속이라는 점에서 본 전시의 참조점이 된다. 이러한 관점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원형식물(Urpflanze)’ 개념에서도 발견된다. 괴테는 식물의 잎, 꽃잎, 수술, 암술이 서로 다른 기관이 아니라 동일한 기본 구조의 변형이라는 점을 통해, 모든 형태가 하나의 원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원형은 고정된 기원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형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메타모르포시스이다. 원형은 반복되지만 동일하게 되돌아오지 않으며, 차이를 축적하면서 계속해서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겹꽃에서 원래 수술이 있어야 할 자리에 꽃잎이 늘어나는 현상은 꽃잎과 수술이 서로 완전히 분리된 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기본 형식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임을 보여준다.
본 전시는 이러한 변신 이야기와 원형식물의 형태를 작품의 형성과 작가와 작품 간의 관계를 읽는 하나의 방식으로 가져온다. 전시장에는 작품과 작품 사이를 이어주고, 작품 사이의 간격과 관람 동선 또한 원형 혹은 나선의 배열을 이루도록 구성한다. 작가와 작품, 재료와 환경은 분리된 채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함께 형성된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 때 자신의 과거를 단절하고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미술에 있어 새로움은 늘 요구되는 것이지만, 실상 새로움이라는 것은 과거를 무화한 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구성해 온 것을 폐기하지 않고 작품을 이어 가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한 연속적 변형의 맥락에서 작가와 작품의 관계가 이해될 수 있다. 작가와 재료의 관계 또한 수동적이기보다는 함께 접촉하고 서로를 변형시키는 관계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조각에서 재료의 무게, 질감, 물성 등은 작가가 구상을 수정하고 다시 조직하게 만들며 회화에서도 물감의 흡수와 화면의 조건 안에서 형태가 조정되는 과정은 재료와 구조가 맞물리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처럼 작품은 재료와 구조, 그리고 작가가 서로를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작가는 작품의 고정된 기원이기보다 재료와 환경, 타자와의 관계를 경유하며 변화 속에 놓인 존재이다. 창작은 여러 접촉과 통과를 통해 형성되는 관계적 과정에 가깝다. 이처럼 삶이 동일한 형태에 머무르지 않듯 작품 또한 단독의 산물이라기보다 관계와 여러 변화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1) 각자도생(各自圖生)은 각자가 스스로 제 살길을 꾀한다는 뜻의 사자성어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은 환경에 가장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2) 다프네는 태양신 아폴론의 집요한 구애를 피해 달아나다가 끝내 자신의 몸을 나무로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여 월계수로 변한다. 『내 여자의 열매』의 주인공 ‘아내’는 점차 식물로 변해가는 여성으로 일상의 억압과 관계의 피로 속에서 식물로 변신하며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이탈한다. 그녀의 변신은 도피이자 저항으로 읽히며, 식물-여성의 맥락에서 두 존재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김민훈은 솟아오르는 기둥 형상의 <손돌> 연작과 아래로 처지는 펠트 작업 <잠정적으로 개잡놈>을 서로 마주 보게 배치한다. 두 작업은 석순과 종유석이 수천년이 걸려 서로가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작가가 지나온 시간이 지나 <손돌> 연작은 솟아오르고<잠정적으로 개잡놈> 은 중력에 의해 늘어지며 만난다. 또한,<손돌> 연작 과 <잠정적으로 개잡놈> 은 서로를 향하며 나선형을 염두에 두고 배치된다. 나선은 같은 방향으로 감기고 풀리며, 위치와 간격에 따라 다른 층위를 만들며 연속한다. 이러한 나선의 특징은 작가가 불러온 작품의 재료에서도 이어진다. 흙이 작가의 사적 기억과 축적의 시간을 품고 있다면, 펠트는 재료 자체의 시간과 그것을 둘러싼 맥락을 겹겹이 간직한 채 노출되며, 누적된 시간의 무게를 중력에 따른 처짐과 흔들림으로 드러냄으로써 더 이상 중립적 재료로 머물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김민훈의 조각은 재료 안에 이미 축적된 시간, 사용의 흔적, 물리적 저항을 받아들이는 재건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재건은 남겨진 것, 버려진 것, 불완전한 것을 제거하지 않고 조각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뜻한다. 재건으로 기립하는 조각들은 다른 것과 결합하고 변형되며 다른 방식으로 서게 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조각은 재료를 포함하여 작가와도 연속된다. 작가는 방치되거나 남겨진 것, 이전의 용도와 맥락을 잃은 재료를 향한 연민을 조각 안으로 끌어온다. 이 연민은 재료를 단순히 회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지닌 시간과 훼손의 흔적을 받아들이며 다시 관계 맺고 설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다. 흙과 펠트는 서로 다른 물성과 시간을 지닌 재료이지만, 조각가의 긴밀한 접촉을 거치며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되지 않는 구조를 이룬다. 이는 뿌리와 줄기, 잎과 가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고 얽히며 전체를 구성하는 식물적 생장의 방식과 맞닿아 있다. 김민훈의 조각 역시 하나의 중심을 통해 직립하는 형상이 아니라, 작가와 재료의 고유한 힘, 기립과 처짐이 함께 작동하는 장에 가깝다. 이처럼 조각가와 조각, 재료, 기법, 기억은 나선형으로 흐르며 서로를 지나치고, 다시 만나고, 그 만남 속에서 조각을 서게 하는 힘을 만든다.

이환희가 설명하는 ‘회화 상황’내에서 원형은 고정된 형태나 완성된 기준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여기서 ‘회화 상황’은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조형적 사건인 동시에, 회화 언어의 약속이 작동하는 곳이다. 작가는 선, 면, 색, 구조, 여백, 반복, 배열 등을 독립된 요소로 다루기보다, 그것들이 캔버스의 조건면에서 어떤 방식으로 변환되는지를 묻는다. 회화로 성립하기 위해 형태가 통과해야 하는 조건 앞에서, 작가는 ‘회화 상황’이 발생시키는 선택과 과제를 공략해 나가는 플레이어가 된다. 드로잉이나 조각에서 출발한 형태는 회화로 옮겨질 때 캔버스의 비례와 평면과 색면의 관계 속에서 다시 번역된다. 이처럼 이환희의 ‘회화 상황’은 조형과 형태가 매체를 옮겨 갈 때 발생하는 수정과 변형, 그리고 그 수정 이후 다시 회화 상황에 맞춰 형태를 갖춰가는 과정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 상황은 서사의 차원보다 조형과 형태의 입장에서 말해진다. 그는 유화가 마르는 시간 동안 여러 캔버스를 동시에 펼쳐두고, 수정하거나 우연히 발견한 해결책을 다른 작업으로 이동시킨다. 이때 회화는 매번 새롭게 조정 가능한 상황이 된다. 최근에 그는 ‘회화 상황’에서 규칙이라는 말보다 게임이나 퀘스트에 가까운 의미에서 작업에 임한다. 이는 회화가 회화 자체의 논리 안에서만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이해하고 부과한 회화의 조건과 화면 내부의 반응이 맞물리며 진행된다는 뜻을 내포한다. 원형은 이 게임에서 불현듯 도래하는 이미지이자,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모티프이며, 동시에 매번 다른 조건 속에서 갱신되는 구조이다. 따라서 원형은 원본이나 기준점이 아니라 여러 형태로 전개될 수 있는 잠재적 형식에 가깝다. 이러한 방식은 식물이 하나의 고정된 형태를 유지하기보다, 동일한 구조를 반복하면서도 위치와 조건에 따라 다른 기관과 방향으로 분화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독립된 원형들의 집합이라기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확장되는 연속적 체계에 가깝다. 한 화면에서 형성된 원형은 다음 작업으로 이동하며 변주되고, 그 변주는 다시 전체에 영향을 가한다. 원형과 변형, 규칙과 우연, 반복과 차이는 하나의 화면 안에서 플레이되며 회화가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계속 변신하는, 생성의 과정임을 드러낸다.

하성욱은 자신을 이루어온 요소들을 조각 안으로 끌어들이는 시도를 한다. 그에게 가죽, 건축, 식물은 서로 다른 삶의 지점에서 비롯되지만 모두 그의 삶을 통과한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 가죽은 한때 그에게 사업의 주요 상품이었으나, 사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교환가치를 갖지 못한채 남겨졌다. 건축 구조에 대한 그의 관심은 경제적 자립을 위해 머물렀던 건설 현장의 경험, 그리고 도시가 만들어내는 구조물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식물은 그에게 내부 질서와 구조를 탐구할 수 있는 조형적 모델에 가까운데 그가 식물에 주목하게 된 계기도 현대미술의 텍스트화 요구에 대한 피로와도 관련이 있다. 그에게 식물은 설명해야 할 내용이기보다 복잡한 구조와 질서를 가진 심미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시각적 대상으로 다가왔다. 식물의 성장 방식 안에서 지지, 분기, 반복, 확장의 구조를 발견하고, 이를 조각이 스스로 서는 방식과 연결한다. 이때 식물은 조각의 자립과 변형을 사유하게 하는 구조적 참조점이 된다. 이전의 하성욱 조각에서 가죽, 건축, 식물이 각각 독립적인 요소로 드러났다면,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조각에서는 세 요소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가죽은 조각의 표면이자 지지체가 된다. 건축적 구조는 조각을 물리적으로 지탱하는 골격으로 작동하고, 식물의 내적 질서에서 비롯된 분기와 확장의 원리는 조각이 계속 뻗어나가고 변형될 수 있는 상태를 만든다. 이때 조각은 단순히 재료를 조합한 결과가 아니라 그에게 노동, 생계, 기억, 선망, 폐기의 경험이 서로 얽히며 다시 조직되는 장이 된다. 하성욱은 ‘자기 자신’을 작업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한 개인적 배경으로 남기지 않는다.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지 되묻는 과정에서 ‘자신’을 자연스럽게 돌이켜 보고 이를 조각의 언어로 직조하고 결합하고 연속시킨다. 이처럼, 그의 조각은 ‘나’와 분리되지 않는다. 삶의 흔적들이 조각 안에서 발현되는 과정 속에서, 작가는 조각과 함께 남겨지고 변한다.

함수지는 인간의 신체와 식물의 형상을 결합시켜 다른 형태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에서 신체는 완결된 형태가 아니라 내부의 상처와 외부의 환경에 반응하며 계속 변형되는 유기적 존재로 나타난다. 작가는 나팔관, 자궁, 골반뼈와 같은 내밀한 신체 기관을 식물의 줄기, 꽃잎, 촉수와 결합시키며, 신체 내부에서 발생한 변화가 외부로 밀려나오는 장면을 만든다. 이때 식물은 몸 안에 고인 것들이 다른 형상으로 자라나는 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된다. 그가 다루는 상처는 치유되어 사라져야 할 대상이 아닌 몸 안의 불균형을 드러내고, 피부 위로 표출되며, 시간에 따라 색과 형태를 바꾸는 상태에 가깝다. 멍이 푸른빛에서 연두빛으로 옮겨가고 다시 피부의 색으로 돌아오듯 말이다. 상처는 아무는 대신, 꽃이 열리듯 벌어지고 번지며 또 다른 형상으로 증식한다. 이는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억압되거나 침묵해온 내부의 힘이 다른 생장 방식으로 표면화하며 외부와 접촉하고 스스로를 보존하는 과정이다. 작가노트에 “외부 세계에 예민하게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나를 둘러싼 모든 자극, 일상 속 사건, 그 사건으로부터 발현되는 감각을 다시 외부 환경에 뿌리며 또 다른 사건이 어디선가 자라나는 것을 상상합니다. “라고 적는다. 이처럼 함수지의 작업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는 고정된 구분선이 아니라, 자극이 드나들고 머물며 다른 형상으로 “바삐 변형”되는 자리다. 그러한 맥락에서〈로샤〉라는 제목은 헤르만 로르샤흐(Hermann Rorschach, 1884~1922)의 잉크 반점 검사에서 비롯된다.3 좌우대칭의 모호한 얼룩을 보고 각자가 다른 형상을 떠올리듯,〈로샤〉또한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꽃이면서 날개이고, 촉수이면서 수술이며, 때로는 자궁이나 마주 보는 인간처럼 읽힌다. 화면 중앙에 놓인 대칭적 형상은 관람자로 하여금 이미지 앞에서 무엇을 읽어내고, 무엇을 투사하는지 묻게 한다. 그러므로 〈로샤〉는 침묵에 균열을 가하고, 무의식을 끌어올려 계속 다른 이름으로 읽히고 살아 남는 자신에 가깝다.
3) 〈로샤〉라는 제목은 헤르만 로르샤흐의 잉크 반점 검사에서 비롯되었다. 함수지는 이 검사를 처음 ‘로샤 검사’라는 이름으로 접했고, 이후 ‘로르샤흐 검사’가 정식 명칭임을 알게 되었으나, 처음 인지한 호칭이자 익숙해진 이름으로 ‘로샤’를 사용한다. 함수지는 ‘로르샤흐 검사’의 방식과, 자신이 만들어낸 생명체 〈로샤〉가 고정된 하나의 형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방식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