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슈톨렌²』에 수록된 글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7일간의 근무 그리고 키아프-프리즈-아트위크 기간이 끝났다. 고된 스케줄로 엉망인 내 몸 상태와 예민한 감정은 누군가에게 곁을 내줄 여력까지 앗아갔다. 사람들이 “바빠서 어떻게 해요.” 라고 하면, “바쁘면 좋죠.”라고 대답하긴 하는데 사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쁜 건지 아리송하다. 미술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을 떠올리면 바쁜 게 낫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는 노력하면 상승할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과연 지금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갤러리에서 일하며 어시스턴트,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등 여러 위치를 거치는 동안, 나는 조용한 목격자로서 미술계의 구조와 시장 시스템을 체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장이 형성한 위계와 구조 그 구조에서 탈락한 자들을 마주하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문제는 시장이 환영받고, 시장이 중심축으로 여겨지며 발생한 미술계 주체들—작가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등—의 불안과 분열적 상태이다. 예를 들면, 작가는 갤러리에 의해 선택되고,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갤러리와 함께 국내 아트페어에 참가하여 자신과 작품이 시장에 노출된다. 기회가 주어지면 해외 아트페어에 나갈 수 있게 되고 상업적 성공과 명성에 가까워질 것이다. 시장으로부터의 인정은 작가 간의 경쟁의 결과이자 성공의 준거가 되고 이것은 어떤 이에게는 우울감과 부러움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러한 시장으로부터의 인정이 자신을 상업적인 작가 또는 시장에 좌지우지 당하는 주체성 없는 작가로 읽히게 할까 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우울해진다. 갤러리스트인 나 또한 이와 유사한 고민을 하게 된다. 직업적으로 작품에 가격을 매기고 판매를 해야 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미술이 내놓아야 하는 담론을 기대하고, 미술이 사회적 문제를 주창하고 그 해결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최근 C와의 대화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털어 놓았는데, 시장에 밀접한 내가 시장에 의해 발생하는 위계 혹은 구조적 모순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당사자성이 없고, 그래서 이를 발화할 때 실수하거나 혹은 실패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그 고민이 필요한 때라고 답해주었다. 사실 의외의 반응이었다. 나는 이 문제가 그만큼 중요하거나 시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내 생각은 그저 그런 정도로,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그 대화 이후 이 문제를 깊게 파헤쳐보기 시작했다.
문제의 절정은 아트페어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갤러리스트로서 아트페어에 참가할 때마다 시장과 미술이 서로를 거부하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 작가와 작품은 자율성을 쫓으면서도 시장 구조 안에서 승인되기를 요구받는 모순적 위치에 놓여있는 점이라든지, 사회 고발적인 메시지를 담았으나 매끈하게 팔릴 수 있는 애매모호한 작품을 만난다든지 말이다. 관련하여 나는 최근에 프랭크 와셔(Frank Wasser)의 “Art Basel: For Those Who Wish to Remain Anonymous”를 읽고 깊이 공감하였는데, 프랭크 와셔는 작품의 메시지와 시장 논리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pervasive)”라고 진단한다.“갤러리들은 대체로 아름다움(beauty)과 주관성(subjectivity)이라는 피상적인 주제를 선호했는데, 이 단어들은 자주 반복되어 의미마저 희미해졌다”고 한다. 아트페어에 진입하기 위해서 작가는 이념적 입장을 명확히 주장하기보다는 시장의 승인을 받기 위해 암시나 함축, 은유하는 현상을 목격한다.
시장은 작품이 유통되는 경로라는 점에서 수단이지만, 동시에 그 유통 과정에서 형성된 가격과 거래 기록은 다시 작품과 작가의 위상을 결정짓는 지표로 작동하기에 결과이기도 하다. 오늘날 작가와 작품, 전시 등은 자주 시장에 의해 평가받으며 시장은 미술계 내의 위계를 생산하는 듯 보인다. 작가는 작품의 가격으로 평가받고 전시는 판매 실적과 관객 수, 미디어 노출 등 시장적 효과로 환산된다. 비평가와 큐레이터, 제도 종사자들 가운데 일부는 (독립 큐레이터나 미술 전공 교수 등 제도와 시장을 가로지르는 인물들을 포함하여) 2022년 출범한 프리즈 서울이 야기한 상업성과 거대 자본을 비판했다. 하지만 몇몇 미술관은 해당 시기에 전략적으로 전시를 내놓았고, 서울시도 서울아트위크를 내놓으며 프리즈 서울의 반응을 살피는 쪽이었다. 전자의 비판은 상업성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면, 후자의 움직임은 경제적 성공을 향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겉보기에는 고상한 순수성을 옹호하는 입장과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입장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둘은 예술 장 안에서 분리될 수 없는 공모 관계를 형성하며 위계를 생산한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말을 빌려 설명해 보면, ‘장(field)’에서 인정받은 상징자본, 즉 미술에 부여된 일종의 순수성, 고유함, 원본성 등이 축적되면 경제자본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프리즈 서울에 반응했다고 볼 수 있다. 상징자본과 경제자본은 반대되는 듯 보이지만 완전히 겹쳐지 않는 간극 속에서 작동하는 데 그 간극에서 위계가 발생하고 그 위계를 생산하는 구조는 은폐된 채 재생산된다. 담론을 만드는 제도권 행사 즉, 비엔날레나 주요 미술관에서 개인전에서 주목받은 작가가 아트페어에 참가할 경우 상징적 성취가 시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정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비엔날레라는 제도적 인정인 상징자본이 있었기에 시장에서 작품이 고가에 판매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아트페어만을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는 상업성에 종속된 존재로 간주될 여지가 있다. 상징자본을 쥔 자는 그것이 경제적 이익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감춰야 한다. 만약 그 사실이 드러난다면, 자율성과 독립성이라는 장에서 형성한 권위의 근거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조는 은폐된 채 재생산되고 그 속에서 상징자본과 경제자본의 간극에서 비롯된 위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시장의 논리와 경제자본의 유입이 배제된 상태에서 미술계가 유지되는 건 점점 어려워진다. 동시대 미술계 주체들(특히 작가들)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인다. 시장에 승인받기 위해 경쟁하고 투쟁해야 하는 듯 보이나 동시에 시장이나 외부 영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보존해야 하는 압박을 받는다. 시장으로부터 승인받고자 하면서도 자율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중적 요구는 분열적 상태를 야기한다. 이들은 현실적으로 시장 진입이 필요하고 이때 경제 자본은 물적 조건이자 그 부재는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그러나 시장과 시장을 움직이는 경제자본을 향해 노골적 욕망을 드러내면 예술 장에서 공고히 지켜져 왔던 자율성과 순수성을 훼손한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결과적으로 겉으로는 자율성과 무관심을 표방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시장 진입과 승인 조건을 치밀하게 계산하는 이중적 태도를, 일종의 위장술로 자신을 숨겨야 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그 과정에서 일치되지 않는 욕망과 조건 속에서 불안과 분열감을 느낀다. 부르디외가 말했듯, 예술 장에서 상징자본은 ‘경제적인 것의 부정(disavowal of the economic)’을 전제로 작동하기에, 이들은 시장의 논리에 의존하면서도 무관심한 태도를 연기한다. 미술이 오랫동안 유지해 온 자율성과 순수성의 믿음은 이러한 위장된 태도를 통해 보존되고 시장은 이를 와해시키기보다 오히려 이용하며 강화한다.
작가들은 시장을 향한 욕망을 정당화할 언어가 부재한 상황에서 그것을 무관심으로 포장하며 자신을 설득하고 있는 듯 보인다. 경제자본에 무관심한 자만이 진정한 작가라는 식의 분위기가 만연하기 때문에 이를 원하지 않는 척하게 된다. 그렇지만, 상징자본을 전략적으로 획득하면 경제자본도 함께 획득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혹은 시장에 대한 거부나 비판의 제스처조차 종종 시장에 흡수될 때도 있다. 이처럼 자율성은 역설적으로 시장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즉, 제도적 승인으로 축적된 상징자본이 자율성의 근거로 작동하며, 그 자율성이 다시 판매 행위를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상징자본과 경제자본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물론 시장과 자본이라는 하나의 편향된 목표만을 쫓는다면 미술이 다양성을 잃고 시장과 자본에 의해서만 승인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시장과 경제자본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오늘날 미술 실천을 지속하거나 재구성할 수 없다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한다. 시장을 거부하거나 수용하는 식의 이분법적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 시장과 경제자본은 미술 외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존재하는데, 이때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가에 있다. 그러니까 시장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이곳에 침투하고 있는데, 나는 그 안에서 충실히 바쁘고,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았고, 이미 그 질서의 일부가 된 것을 발견했다. 그 과정에서 그저 불평과 싫증만 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부정적 감정을 지워버리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감정의 표출만으로는 이미 내부에 침투한 시장의 질서를 해체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일치하는 세계가 부재하는 이곳에서 시장을 향해 맞고 틀리고를 판가름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 같다. 시장이든, 자율성이든 그 무엇을 쫓든, 외부의 시선과 자기 부정이라는 이중적 압력 속에서 미술계 주체들은 여전히 불안한 간극에 놓여 있다.
1 “Art Basel: For Those Who Wish to Remain Anonymous”, Frank Wasser, Flash Art June, 2025,
https://flash—art.com/2025/06/report-artbasel-2025/ (2025년 7월 1일 접속).
2 서울아트위크, https://artinseoul.kr/artweek/aw/ (2025년 7월 20일 접속).
3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장(field)’은 상대적 독립성이 보존되는 영역으로 구성되고 사회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객관적 관계들이 형성한 공간으로 각 장은 다른 장과 구별되는 고유한 이해관계와 권력 구조를 가진다. 예술 장은 예술적 자율성과 외부로 유입되는 힘인 시장, 제도, 권력이 교차하는 곳이다. 장 내 참여자는 명성, 권위, 평판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인 상징자본의 분포에 따라 평가받는다. 장은 자율성과 종속, 인정과 배제의 힘이 교차하며 끊임없이 균열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4 피에르 부르디외는 「The Production of Belief」에서 상징자본이 경제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구조를 설명하며, 이러한 전환이 ‘경제적인 것의 부정(disavowal of the economic)’을 통해 은폐되어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