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은 어떤 유토피아를 상상하는가?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은 어떤 유토피아를 상상하는가’라는 질문은 미술 시장을 오랫동안 목격하고 관찰하며 품어 온 것으로, 현재 한국 미술 장과 시장 간의 관계를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라데서 비롯되었다. 미술 장을 구성하는 여러 형식 중 시장을 중심으로 살피기 위해 ‘전시’와 ‘아트페어’를 주목한다. 전시와 아트페어는 작품을 공간에 배치한다는 외형을 공유하지만 그 목적과 구조는 서로 다른데 전통적인 전시가 담론 형성 혹은 작품의 심층적 뷰잉을 중심으로 설계된다면, 아트페어는 거래와 판매를 전제로 효율적이고 즉각적인 소비 구조를 마련한다. 오늘날의 전시와 아트페어는 서로의 언어와 형식을 빠른 속도로 공유하며 전시와 아트페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전시와 아트페어의 생산과 소비의 주기가 짧아지고 과잉 포화 상태에 이르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전시와 아트페어는 어떤 조건 속에서 서로를 닮아가고, 또 다른 점을 드러내는가. 서로를 반영하는 속도는 왜 더 빨라지는가? 이미 존재했던 유토피아들을을 따라 잡기 위해서 이들은 가속화되는 가. 그렇다면 프리즈 서울은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향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불가능한 유토피아의 환상을 재현하고 있는 것인가. 이 글은 프리즈 서울을 중심으로 전시, 아트페어 혹은 미술 시장과 미술 장이 맺는 관계를 다시 살펴보고 ‘비실체, 큐비클, 이동성, 새로움’이라는 네 가지 시선으로 그 차이와 접점을 가늠하고자 한다.
- 프리즈 서울과 비실체적 현상
2022년 프리즈 서울의 출범 이후, 한국 미술 현장은 프리즈 서울, 그러니까 시장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프리즈 서울을 중심으로 쏟아지는 오프닝 파티, 야간 개장, 유명인사 초청 경쟁등 과잉된 장면들은 프리즈 서울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경쟁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투쟁의 과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투쟁은 동시에 경계적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드러낸다. 이는 시장과 자율성이라는 상이한 질서가 교차하며 비실체적 현상들을 포착한다.
내가 비실체적이란 표현을 쓴 데에는 흐릿하거나 모호한 특징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트페어에 선정되지 못한 작품은 미술 현장에서 도태되거나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오늘날의 아트페어가 시장과 자율성 사이에 걸쳐 있으며, 그 속에서 불확실하고 흐릿한 정체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프리즈 서울에 출품된 작품은 제도권과 연계해서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데, 예를 들어 프리즈 서울 프로그램인 프리즈 라이브 연계 전시인 아트선재센터의 ‘오프 사이트’는 국제 갤러리와 투게더투게더에서 개최된다. 아트페어와 갤러리, 미술관과 연계되는 구조는 결국 더 많은 노출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트페어와 연계된 작품과 전시는 궁극적으로 시장이 환영하는 소비 가능한 작품 혹은 프리즈 서울의 브랜딩을 위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 때문에 아트페어에서 호명되는 작품과 전시는 유령과 같은 결과물을 만들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번 프리즈 서울 2025에 참가하는 솔로 섹션을 소개하는 글을 토대로 보면 , 레오 갤러리 (Leo Gallery)의 구샤오핑(Gu Xiaoping)에 대한 설명은 ‘서양의 색면 회화를 연상시키지만, 중국 전통 먹선 측정 도구를 사용해 화선지와 린넨 위에 정밀한 선을 구현한 작업’으로 소개된다. 이 반복과 일상의 행위가 불교적 선(禪)의 영성을 담고, 디지털 과잉 시대의 사색적 해독제가 된다는 설명이 따른다. 갤러리 쿠인(Galerie Quynh)의 리엔 쯔엉 (Liên Trường)은 난민 경험과 억압·이주·신체 변화를 주제로 작업하며 ‘아시아 미래주의’(Asian Futurism) 회화 언어를 발전시켰다고 소개된다.

갤러리 쿠인(Galerie Quynh)의 부스 전경 (직접 촬영)
SAC 갤러리 (SAC gallery)의 프라팟 지와랑산(เจิ้น ประพัทธ์ จิวะรังสรรค์ )은 디지털 편집, AI, 콜라주, 직접 현상한 네거티브 필름을 결합해 태국의 역사·기억·정치·이주를 다루며, 매체와 정체성이 조작·위조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SAC 갤러리 (SAC gallery) 부스 전경 (직접 촬영)
키앙 말링게 갤러리 (Kiang Malingue)의 쳉 치엔잉( Tseng Chien-Ying)은 전통 기법과 현대적 퀴어 감수성을 융합한 작품으로 설명된다.

키앙 말링게 갤러리 (Kiang Malingue) 부스 전경 (직접 촬영)
이처럼 작품들은 각기 고유한 주제의식을 내세우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시장의 요구에 맞춰 팔릴 수 있는 내용과 이미지 안에 수렴되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래서 안전히 거래될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한다.
미술 장은 오랫동안 경제적 가치를 부정하며 세속적 생산이 거부되는 신성한 장소였다. 프리즈 서울에서 선보이는 작품 혹은 전시는 시장에 맞춰 유연하게 설계된 형식 속에서 희미하게 존재하며 시장 진입을 위한 모호한 전시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 프리즈 서울은 본래 미술이 축적해온 상징자본과 반대되는 가치의 산물이고 그 간극의 공허함으로 인해 ‘비실체적’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시는 곧 자율성 논리가 시장 논리에 잠식되는 지점을 보여주며 동시에 두 질서의 간극을 드러낸다. 그러나 내가 흥미롭게 보는 지점은, 역설적으로 이렇게 위축되고 모호한 상태가 더 많은 전시의 유통과 거래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화 산업의 경우 대규모 배포 구조 안에서 생산되는 콘텐츠는 피지배적 위치와 약한 자율성으로 시장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시장에 의해 만들어지는 전시와 아트페어는 대규모 생산과 배포를 통해 더 널리 유통가능하다. 하지만 제한 생산과 대규모 생산의 하위장이 뚜렷이 구분되기 보다 상징자본과 경제 자본의 축 사이에서 점점 더 모호해진다. 이처럼 아트페어는 본래 거래와 교환의 역할을 탈피하고자 미술관, 비엔날레 등과 연속되어 보이기를 꿈꾸고 외양적으로 확장된 듯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대규모 배포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소진된다. 결국 오늘날의 전시와 아트페어는 고유하고 독립적인 존재라기 보다 서로를 반영하고 모방하며 상징자본과 시장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비실체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 아트페어 공간, 큐비클
프리즈 서울은 마치 화이트 큐브를 연상시키는 하얀 벽으로 세워진 큐비클의 반복된 공간을 구성한다. 하얀 벽으로 만들어진 큐비클의 반복은 프리즈 서울이 미술 장에 인정 받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이다. 큐비클은 칸막이로 구획된 좁은 공간으로 미술 대학의 실기실 구조도 큐비클과 가깝다. 이로 인해 작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이미 아트페어의 구조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 큐비클 공간은 작업자의 고립성을 훈련시키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설계되어 상품화 가능성을 은연중에 암시한다.결국 큐비클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개별적이거나 조각 단위로 판매 가능한 작품을 생산하는 환경을 학습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효율적 소비를 위해 만들어진 큐비클은 담론을 형성하기 위한 전시의 의미 체계에서 벗어나 있어 그 맥락과 단절된 공간이다. 때문에 큐비클로 구성된 프리즈 서울을 시장에 맞춘 개별 상품 단위를 위한 곳으로 비춰진다.
큐비클과 화이트큐브 그리고 백화점 간의 관계를 살펴 보면, 화이트큐브는 외부 세계를 차단하고 흰 벽과 균질한 조명으로 구성된 ‘무시간성’의 무대이며 이 안에서 전시 자체가 작품의 의미를 규정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다음으로 백화점은 외부 세계를 차단하는 동시에 소비의 장치로 확장한다. 브랜드별로 분할된 쇼룸은 시선과 동선을 통제하며 상품을 개별 단위로 분절해 즉각적 구매 욕망을 자극하도록 배열한다. 마지막으로 큐비클은 이 구조를 한층 세포화하고 가속화한다.
큐비클로 구성된 아트페어의 전시 단위들은 한정된 면적과 시간 안에서 작품을 최대한 빠르게 보여준다. 개별 상품 단위로 기호화되고 판매를 전제한 모듈로 볼 수 있다.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미술의 상업화를 지적하는 데 있지 않다. 화이트큐브의 맥락에서 아트페어의 큐비클은 해석되고, 백화점 쇼룸의 문법을 따르며, 큐비클로 이어지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아트페어의 큐비클은 전시를 꿈꾸지만 전시의 부속품으로 위치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드러낸다.

프리즈 서울 2025 전경 (이미지 출처: ART NEWS)
https://www.artnews.com/list/art-news/market/frieze-seoul-2025-best-booths-1234750713/
- 이동과 공간으로서의 전시
이번에는 전시가 ‘이동’과 마르크 오제(Marc Augé)가 제시한 ‘비장소’(Non-lieux)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더불어, 프리즈 서울이 유토피아에 도달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밖에 없는 이유와 그 이동으로 인해 어떤 혼종적 모습을 보이게 되는 지 살펴 본다.
마르크 오제에 따르면 장소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관계, 기억, 고유한 정체성이라는 세 가지 조건의 두께를 언급한다. 몇일 혹은 한달 단위로 철거되는 전시는 앞서 말한 두께감을 지니고 있지 않기에 잠시 거쳐 지나가는 추상적 공간에 가깝다. 마르크 오제는 공간에서의 ‘이동’을 주목하는데 전시는 짧은 기간 존재하였다 사라지는 ‘이동’을 수행하는 공간이며 관람객이 ‘이동’하며 보는 경관으로서의 공간이다. 달리 말하면, 전시는 작품을 ‘이동’하기 위한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시장이 개입하면서 전시는 ‘이동’은 가속화 되는데, 작품을 교환가치로 환원 시키는 일종의 ‘이동’을 유도하며 전시는 그 구조 아래 ‘이동’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이동’의 특징은 시장으로 인해 지속적인 머무름이 불필요해지고 빠른 순환과 교환이 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이동’에 의한 전시는 점점 자기 비판성없이 자기 조건과 맥락에 대한 자의식을 점차 상실하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전시는 방해물을 피하며 더욱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정체성, 디아스포라, 매체, 퀴어’등 이미 합의된 이론과 인정 받은 키워드들을 흡수하는 경향을 보인다. 프리즈 서울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을 확장하기 위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로, 아트선재센터로,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단 4일동안 열리는 프리즈 서울은 빠르게 다양한 요소로 결합하면서 빠른 ‘이동’이 가능하고 이로 인해 프리즈 서울은 혼종 결합체로 작동한다. 전시와 아트페어는 이처럼 구획을 나누고 그 경계를 유지하기 보다 혼종적으로 겹쳐지며 서로의 위치가 동등해지게 되고 경계가 설정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프리즈 서울2025의 프로그램 ‘프리즈 라이브’의 아트선재센터의 기획전 《오프사이트 2: 열한 가지 에피소드》는 ‘한국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차세대 한국 여성 및 젠더퀴어 작가들의 작업을 조명하며, 다층적으로 전개되는 젠더와 퀴어 서사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오프사이트 2: 열한 가지 에피소드》에서 드러나는 지점은 프리즈 서울과 아트선재센터라는 서로 다른 영역으로 분리된 듯한 제도와 시장이 ‘퀴어’와 ‘여성’이라는 의제를 전시의 주제어로 전면에 내세운 방식이다. 후원과 평판을 고려해 충돌을 최소화 하기 위해 관객과 내부 이해 관계자를 안심시키고 만족감을 제공하는 목표를 가진 것처럼 보여 지고 내부자들끼리 확인하는 자기 지시적 의례로 비춰질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미술이 더 이상 현재를 반영한 무언가를 창출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향수의 형태로만 남는다. 이렇듯 (미술계 내부적) 자기 만족을 기반으로 재생산하는 전시가 의례가 된다면 미술의 동시대성은 작동을 멈추게 될 것이다.
프리즈 하우스 서울의 개관전 또한 ‘퀴어’를 키워드로 내세웠다.


(이미지 출처: artwalk.kr 인스타그램 & 프리즈 서울 공식 홈페이지)
하지만 프리즈 서울은 미술 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제도권 미술 담론을 끌어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인 동시에 소위 선구적 작품을 판매 해야 하는 이중적 위치에 놓인다. 프리즈 서울은 제도권 미술 담론을 흡수해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하고 또한 이를 시장 친화적인 형식으로 가공하고 기호화하는 경로를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시는 빠른 이동을 위한 혼종적 모습을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프리즈 서울의 전략은 이미 합의된 의제를 표면적으로 소비하는 경향과 유행을 쫓는 듯한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미술 장의 승인과 시장의 성공을 동시에 쥐어야 하는 프리즈 서울의 유토피아는 상이하게 얽혀 뒤죽박죽되고 오히려 약화되고 상대화되는 결과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의 유토피아는 더 이상 환상이 아닌 기존의 것들, 미술 장에 남아 있는 잔재를 재구성하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프사이트 2: 열한 가지 에피소드》포스터(이미지 출처: 아트선재 공식 홈페이지)
또한, 프리즈 서울 2025에서 프리즈 필름 프로그램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과 결합된 사례는, 아트페어와 비엔날레라는 상이한 장치가 상징자본을 공유하며 관객과 시장을 동시에 끌어들이는 또 다른 사례로 볼 수 있다. 프리즈 서울이 없었다면 연계 스크리닝 프로그램은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엡손의 후원이 없었다면 우리는 SMB13 x 프리즈 서울 2025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SMB13 × Frieze Film Seoul 2025 스크리닝 현장(직접 촬영)
이처럼 아트페어, 미술관, 비엔날레가 시장과 제도의 경계에서 등가적으로 배열되는 모습은 프리드릭 제임슨이 말한 ‘새로운 깊이 없음’의 사례가 될 수 있다. 예술이 이면의 본질을 추구하기 보다 이미지의 조합과 겹침이 핵심이 된다. 혼종적인 모습이 표면적으로는 탈경계적 실험이나 시도로 보일지 모르지만, 경계가 사라질 때 전시는 더 이상 비판적 위치를 선명히 구축하거나 특정한 질서에 저항하는 입장을 취하기 어려워진다. 이처럼 경계를 잃는다는 것은 시장에 저항할 힘을 잃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동’은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구분 불가능한 이미지 덩어리로 비판적 거리가 삭제된 평면화의 징후가 된다. 이러한 징후는, 프리즈 서울의 유토피아 어쩔 수 없이 납작해질 수 있음을 함의한다.
- 새로움의 무력화
전시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장의 논리에 흡수되며 새로움을 잃게 된다. 전시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산출해야 한다는 압박에 직면한다. 그러나 바로 이 새로움이 시장 체제 안에서 어떻게 무력화되는가.
자본과 거리를 두는 듯한 위장된 자율성은 곧 새로움을 추구하는 강박으로 이어진다. 미술 현장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움을 생산해야만 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내가 먼저 선점하지 않으면 낡은 것이 돼 버릴까 두려워 한다. 이 새로움은 시장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오늘날 전시는 수익을 내기 위해 만들어지고 이는 소비와 연계되고 소비는 새로움을 쫓아야만 한다. 새롭고 신선한 것들을 경제적 압박에 의한 것이다. 만약 새로움을 획득하여 전시가 성공하는 순간 곧바로 시장에 흡수되어 더 이상 새로움을 추구하기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시장 체제의 요구에 순응의 표시로 비쳐 무력화된다. 하지만 새로움을 포기할 수는 없는데, 새로움이 없는 전시는 트렌드에서 밀려난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전시의 구조적 딜레마가 된다. 물론 우리는 이미 완전한 새로움이 등장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전시나 작품은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나 이미지 담론에서 나오는 것이고, 완전히 새롭거나 보편적 진리를 세우는 것은 어렵다.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시대에서, 이미 존재하는 담론과 이미지를 빠른 속도로 차용하고 재구성할 뿐이다. 작품과 전시들은 서로 다른 의미망을 지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결국 작품이 가진 독자적 맥락을 잃고 시장에서 교환 가능한 기호들로 환원된다. 그 결과 전시는 계속 팽창하며 깊이 없이 표면, 혹은 다층적 표면으로 대체되고 증식한다.
오늘날의 아트페어는 어떻게 새로움을 위장하고 있을까. 프리즈 서울에서는 미학적 전복을 표방하는 작품,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프로그램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은 시장의 질서 속에서 전개되며 교환 가능한 기호로 전환되고 시장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형태로 흡수된다. 아트페어는 자본이 원하는 모습이며 소비가 용이한 결과만이 유통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예술적 자율성과 비판성을 유지하려는 규범은 기능을 잃고, 경제적 이윤 창출과 소비자 동원을 보장하는 전시만이 다수 생존하게 되고 진정한 새로움은 없는 상태로 재구성된 새로움만 남는다.
- 나가며
프리즈 서울은 시장 이상의 모습을 상상한다. 아니 상상할 수 밖에 없다. 프리즈 서울은 오늘날 전시와 아트페어가 서로를 반영하며 구분 불가능해진 조건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결과이다.
프리즈 서울은 미술 장의 인정과 미술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도권 담론을 끌어오려는 시도가 이어지지만, 결국 큐비클로 구획된 즉각적 거래를 위한 가시화된 프레임에 갇혀 불완전하게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프리즈 서울은 자율성과 저항은 약화되고 ‘이동’이라는 가속화된 순환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재구성한다. 제도 비판적이거나 실험적인 매체의 도입은 전시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전략이지만, 이는 실상 단기에 그치며 경제적 압력에 의한 강박적 새로움의 생산 메커니즘 속에 흡수된다. 이로써 전시와 아트페어는 더 이상 예술적 자율성을 담보하거나 비판적 거리를 구축하기 어려운 구조에 놓이고 자본이 요구하는 욕망 분배 체계 안에서 소비 가능한 기호로만 살아남는다. 따라서 프리즈 서울이 상상하는 유토피아란, 자율성과 시장, 담론과 거래 사이의 균열을 봉합하지 못한 채 기존의 잔재들을 빠른 속도로 차용하고 재배치하며 유지되는 유토피아다.
‘비실체적 현상’은 상징자본과 시장의 경제 자본이 충돌하며 공허해진 아트페어의 현 주소를 살펴 본다. ‘큐비클’은 화이트 큐브의 자율성을 계승하기보다 거래 효율성을 위해 재편된 구획으로 작품을 상품으로 배치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동’을 위한 전시가 되며 그 깊이를 잃게 된다. 마지막으로 강박적으로 생산되어야 하는 ‘새로움’은 시장 논리 안에서 반복된다. 프리즈 서울은 전시와 아트페어의 경계에서 작동하지만 전시는 시장의 과잉 속에 포섭되어 찢기고 조각나며, 증식하고 가속한다. 남는 것은 자율성의 유령적 잔해뿐이며 이 파편들은 다시 자본의 흐름 속에서 순환하며 새로움을 가장한다.
이처럼 유토피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 아래 프리즈 서울은 자율성과 시장 사이의 끊임없는 타협과 재구성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현장이다. 이때 드러나는 유토피아는 영원히 변치 않을 미래의 진리로써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파편적이고 병렬적인 조합으로만 남는다. 아마도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프리즈 서울의 유토피아는 반복하는 영역에서 만들진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유토피아는 서로 다른 맥락들이 위계 없이 나란히 배치된 것이기에 표면적 차이 속에서만 그 형상을 드러낸다.
1 여기서 말하는 ‘미술 장’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장(field)’ 개념을 미술 영역에 한정해 사용한 표현으로, 『상징권력과 문화』 의 저자인 이상길의 정의를 따른다. ‘장은 (개인들 또는 제도들에 의해 점유되어진) 위치들 사이의, 객관적인 관계들의 – 지배 또는 종속의, 협력의 또는 대립의- 연결망이다.’ ((Pierre Bourdieu, The Rules of Art, 1996: 23; 김동일, 「피에르 부르디외」,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에서 재인용)다시 말해, 사회를 구성하는 개별 활동 영역을 뜻하며, 각 장은 고유한 규칙, 권력 관계, 자본(경제·문화·사회·상징 자본 등)의 분배 방식에 따라 작동한다. 미술 장은 미술에 한정하여 작동하고 미술장은 독특한 논리와 필요를 갖는 객관적 관계들의 공간이 된다.
2 프리즈 서울 홈페이지, 색채와 폐허: 프리즈 서울 2025에서 공개될 10개의 솔로 프레젠테이션, https://www.frieze.com/ko/article/colour-and-ruins-10-solo-presentations-frieze-seoul-2025
3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문화 생산의 장을 제한 생산의 하위장(sous-champ de production restreinte)과 대규모 생산의 하위장(sous-champ de grande production)으로 구분한다. 전자에서의 생산은 전문가들에의해 주로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하고, 경제 논리 보다 장에 내재하는 자율적 기준과 내부 규칙에 따라 작동한다. 반면 후자는 대중 소비 시장을 겨냥하여 경제 자본 획득을 우선시하고, 외부 시장 규칙에 더 크게 종속된다. 두 하위장은 상호 긴장 관계에 있으며 문화 생산의 장 내부 위계와 권력 구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상길, 『상징권력과 문화』, 컬처룩, 2020, 270-273p.
4 마르크 오제(Marc Augé)는 비장소(non-lieu)를 “정체성과 관계되지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으로 규정한다. 그는 공간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를 인용하는데, 세르토에 따르면 공간(espace)은 실천된 장소(lieu pratiqué)로, ‘이동하는 것들’(mobiles)이 교차하며 생성된다. 여기서 이동은 단순한 물리적 움직임을 넘어, 행위자들의 실천인 여행자의 이동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궤적이자 경관(paysage)의 이동이라는 두 층위의 움직임에서 비롯된다.
5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에서 ‘비판적 거리’를 언급하며, 새로운 형태의 평면성 혹은 깊이 없음, 즉 축자적 의미의 표피성(superficiality)을 설명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문화의 폭발적 팽창으로 인해 표면적 이미지와 기호들이 심도 없는 평면 속에 배열되면서, 비판적 거리를 포함한 모든 거리 개념이 사라졌다고 본다.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50p, 119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