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abs 자유기고 코너인 액자들에 기고한 글입니다.
미술의 특수성과 계급, 감정까지
서왕공원에서 열린 류민수 작가의 개인전, 《그리기 위한 조각》(2025)에서 입시 미술 현장을 연출한 공간인 〈Radius〉(2025)를 마주했을 때, 내 과거를 들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숨기고 싶었던, 그러나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던 것으로 나의 정체성을 형성해 온 어떤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엔 부끄러움도 있다. 과거 미술계 안에서 일했지만 자의든 타의든 미술계로부터 탈락했던 기억으로 시작되는 부끄러움이다. 이 복합적 감정은 개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미술계가 갖는 특수한 사회적·계급적 위치에 따라 부여된 감정일 수 있다. 감정이 개인 내부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 속에서 형성되고 배치되는 것이라면 내가 느낀 감정은 내가 미술계에서 경험한 균열된 아비투스(habitus), 그러니까 미술 현장을 경험하고 업으로 삼으며 재구성된 계급적 분열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미지1) 류민수, 〈Radius〉(2025), 석고상, 이젤, 종이, 간이의자, 가변크기.
오래된 시스템, 낡은 노동을 불러오기
류민수는 이번 전시에서 (아마도?)제도권에서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과거의 빛바랜 생산 시스템을 소환한다. 전시장 1층의 방에서는 작가가 상주하며 석고상을 만드는 전 과정을 관람할 수 있다. 이 장면은 노동 그 자체를 전시장으로 끌어들인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석고상은 과거의 표준적인 인간상이라는 개념을 상기시키는데 작가는 ‘사이버 가수 아담’을 석고상으로 복원한다. 그리고 2층에서는 데생이 진행되었던 공간이 펼쳐져 있었는데 이는 지금은 사라진 입시 미술 형식 중 하나인 석고상 데생을 연습하던 장면을 재현한 듯하다.
다만 류민수의 작업이 단순히 입시 미술 혹은 공장 생산 시스템만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곧 분명해진다. 류민수는 석고상을 제작하고 유통하는 전체 과정을 전시장 안에 끌어들이며 예술 노동이 완성된 작품 뒤로 은폐되어 온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실시간 제작, 반복적 수작업, 관객의 참여 유도를 통해 감춰졌던 노동의 현장을 시각화하고 작가의 손과 몸이 어떻게 시스템에 복무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작품의 제작 과정은 역설적이다. 작가는 석고상이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것처럼, 공산품처럼 보이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고 로테이셔널 캐스팅 머신을 직접 제작한다. 이처럼 작가는 그의 생산활동이 기계적 방식에 따른 것처럼 보이도록 제작 과정을 설계했지만 실제로는 모든 과정을 한 명의 미술 노동자인 자신의 수작업으로 수행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1947)에서 문화산업이 창작을 획일화하고 예술의 자율성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그 배후에 존재하는 노동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지적한 바를 떠올릴 수 있다. 규격화된 아담 석고상이 제작되는 퍼포먼스를 포함한 그의 작업은 은폐된 노동 과정을 관객 앞에 드러낸다. 나아가 그는 전시 기간 중 작은 화실 ‘아뜰리에 에덴’을 운영하여 전시장에 방문한 불특정 다수가 아담 석고상을 연필로 묘사하고 그린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키며 관람객이 미술 노동의 일부를 전유할 수 있게 한다. 류민수는 이 모든 과정을 전시함으로써 작가의 노동을 가시화하고 오늘날 미술을 위한 노동이 어떻게 소비되고 은폐되는지를 역설적으로 비판한다.

(이미지2) 류민수, 〈독립 총판 – 생산실〉(2025), 석고생산 퍼포먼스, 전시 기간 중 12시-18시까지.
신자유주의, 미술계 그리고 계급횡단
오프닝에서의 화려한 모습, 고가에 거래되는 미술품, 사회적 지위 유지를 위한 컬렉팅 등으로 구성된 미술현장은 외부에서 보기에 작가들이 계급 상승을 할 수 있는 장이 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작가를 꿈꾸는 이는 작가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훈련받아 온 입시미술과 고가의 학원비, 일반 대학보다 비싼 미대 학비, 대출 그리고 졸업 후 작가 활동을 하는 경로를 거친다. (미술을 전공한 본인의 경험으로는 졸업 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작가 활동으로 진입해야 하는 불투명한 경로에서 탈락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이 일련의 과정은 거대 착취 구조에 작가를 편입한다. 제니퍼 M. 실바(Jennifer M. Silva)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청년들이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실패로 내면화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성숙한 자아 만들기를 요구받으며 자기 계발과 자기 책임의 서사를 강요받는다. 류민수의 퍼포먼스는 바로 이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미술가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작가가 수행하는 노동은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재현되지만 이는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노동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석고상이 각종 업체에 납품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류민수는 작가, 납품업자, 노동자로서 서로 상충하는 아비투스를 내면화하며 그 경계에서 끊임없는 긴장과 자기 분열을 경험한다. 이 복수의 아비투스는 각기 다른 계급적 실천을 체화한 결과이자 미술노동 경계적 위치가 만들어낸 불안정한 정체성의 반영이다. 계급은 쉽게 횡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부분의 작가는 계급 상승을 이루지 못한 채 구조적 재생산의 변두리에 머무른다. 그 결과, 자신이 속하지 못한 계급에 대한 내면적 긴장과 배제감, 실패의 감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이러한 상태는 계급의 폐쇄성과 신자유주의적 자기책임 서사 사이에서 개인이 분열되는 구조로 이어진다.
작가들은 상승과 추락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며 끊임없이 ‘넘어가려는 몸짓’과 ‘넘지 못한 실패의 기억’을 동시에 끌어안는다. 이 시도는 때로 자기 내부에서조차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균열로 남는다.

(이미지3) 류민수, 〈독립 총판 – 재고〉(2025), 석고상, 앵글선반, 목재, 가변크기.
실패, 실패, 실패!
작가들은 작업을 통해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생존을 위해 현실적 경제 조건에 끊임없이 부딪힌다. 만약 작가로 성공한다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으로 계급을 상승시킨 사례가 되지만, 진입하지 못한 이들에게 그리고 그 계급에 속하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에게조차 배신자로 인식될 수도 있다. 만약 실패한다면?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나약한 자로 평가받으며, 자기 책임론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작가들은 지속적으로 ‘탈락’을 경험할 수밖에 없으며, 예술의 순수성, 예술의 자율성과 경제적 생존 사이에서 끊임없는 괴리를 경험한다. 누구도 ‘작가가 되어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 선택이 나의 자발적 결정이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더 깊은 불안을 낳는다. 삶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루어졌다는 환상 속에서, 실패는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해명해야 할 책임으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디쯤 위치할 수 있을까? 《그리기 위한 조각》이 간접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류민수의 퍼포먼스는 단지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예술가의 유예된 위치를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산업 시스템이 생산한 반복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을 수행하며 작가로서의 창작 활동과 물류 노동이 중첩되는 모순된 위치에 놓인다. 총 100여 개의 석고상을 제작하며 겪은 운반의 어려움, 순탄하지 않은 입고 절차, 유통과정 중 석고상 파손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미술 노동을 둘러싼 시스템 자체가 작가의 존재를 얼마나 허약하게 뒷받침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조적 실패다. 류민수는 이 실패를 감추지 않고 전시를 통해 드러내며 작가의 위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미술은 자율적인 창작으로 간주되지만 생계 기반 없이는 지속되기 어렵다. 작가는 자유로운 창작자로 인식되기를 희망하면서도 외부 조건의 종속을 피할 수 없으며 이 과정에서 사회적 승인과 탈락 사이의 긴장을 겪는다. 결국 작가는 자율성과 종속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중적 구속을 살아 낸다.
연대의 부재와 고립
언제 빛을 볼지 모른 채 작업을 이어가는 전업 작가들은 가장 가까운 가족인 부모에게도 그들의 직업적 특성과 감정을 이해받기 어렵다. 부모님에게는 제 밥그릇 못 챙기며 놀고 있는 상태로, 자기 밥그릇 못 챙기는 불효자식이 되어있기도 한다. 시장에게 선택받기를 기다리는 욕망과 자신의 작업 세계를 유지하고 펼치고자 하는 의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작가들을 더욱 고립시킨다. 그들이 느끼는 동떨어짐과 외로움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감정이다. 우리 사회에서 작가는 점점 더 고립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인다. 왜냐하면 과거처럼 ‘함께 성장하는 모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과 자기 계발의 논리가 만연한 환경 속에서, 동료들은 협력자가 아니라 경쟁자로 자리한다. 류민수는 이 지점을 은근하게 드러낸다.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노동하는 작가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은 작가들이 놓인 사회적 위치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연대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기 위한 조각》은 개별 안전망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신뢰하지 못한 채 살아온 세대의 자아를 개념화하는 단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지4) 공-원의 고양이와 류민수의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