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여름부터 지속적으로 고민하며 쓴 글이다. 쓰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폭력이 반복되고 답습되는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폭력이 이미 떠난 자리에서 여전히 문제 의식을 지니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이는 과거의 폭력 장면을 스마트폰 화면으로 넘겨보며 느끼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그 감정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특히 내가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하지 않은 폭력을 디지털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소비하며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의문은 그 경험의 진정성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 폭력이 기록될 때마다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서술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기록의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소리와 자연물이라는 비인간적 매체를 통해 폭력의 흔적을 기록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시도에 주목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기억의 층위를 아우르는 포스트 메모리(post-memory)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국 나는 폭력의 잔존을 새로운 매체를 통해 기록하고, 그 안에 남겨진 의미를 탐구하며 제안하는 글을 쓰고자 했다. 이 글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론, 포스트 메모리, 객체지향론, 파라픽션, 생태주의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또한 사운드를 통해 폭력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도 논의한다.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서 풍경은 종종 기억상실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그 흔적은 감춰져 있고, 오직 발화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인지된다. 발화자가 말할 수 없을 때, 폭력은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워진다. 그러나 어떤 장소는 끝내 외면할 수 없으며, 되돌아가야만 하는 장소가 존재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상실된 기억, 경험하지 못했던 순간과 다시 마주하고, 기묘한 상실감과 동시에 ‘살아 있었음’의 감각을 느낀다. 이 글은 바로 그러한 장소들, 그리고 그곳에서 자연이 기록한 소리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폭력을 기억하고, 또 증언할 수 있을지를 고찰한다.오늘날 폭력은 점점 더 비가시화되고 있다. 가해 주체에 의해 은폐된 물리적 폭력, 생물학 무기와 같은 과학기술적 폭력, 환경파괴에 기반한 구조적 폭력은 모두 쉽게 인지되지 않으며, 종종 의도적으로 잊혀진다. 이로 인해 우리는 보지 못한 폭력, 경험하지 못한 폭력을 상상하고 감각하는 방식으로 그것과 접촉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가시적 폭력을 공적 기억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특히 자연의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듣고, 어떤 감각의 층위에서 폭력을 인식할 수 있을까?

문화인류학자 제임스 클리포드(James Clifford)는 오늘날의 문화가 고정된 장소에서 벗어나 이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구성된다고 말하며, ‘여행하는 문화(Traveling Cultures)’ 개념을 제안한다. 우리는 다양한 장소의 기억을 흡수하고, 뿌리내리지 않은 상태로도 타인의 고통에 접속할 수 있는 잡종적인 기억을 갖게 되었다. 여행하는 문화는 직접 경험하지 못한 타자의 사건들을 더 자주 마주치게 한다. 보지 못한 폭력에 몰입하는 순간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 몰입의 순간과 비인간 존재가 필드 레코딩이라는 방법론으로 폭력의 잔향을 감각하고 기록한 작가들의 전시를 분석한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억압된 기억과 부재하는 과거를 ‘징후 이미지’라는 개념으로 사유한다. 그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예측하고, 은폐된 진실과 접촉하기 위한 장치로서 ‘몽타주’를 강조한다. 이는 단순히 이미지를 병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간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 사유의 방식이다. 이 글은 디디 위베르만의 개념을 시각 이미지에서 더 나아가 ‘소리’로 확장하고자 한다. 소리 역시 억압된 기억의 징후가 될 수 있으며, 예술가의 손을 통해 재편집되고 배치될 때 몽타주의 형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속삭이는 대지》전시 전경 (2024, 아르코 미술관)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최된 이미영 개인전 《속삭이는 대지》(2024)에서 이미영은 ‘홍천 삼마치고개’와 ‘단양 곡계굴’의 폭격 희생지를 다룬다. 이미영은 현장의 흙에서 채취한 균사의 전기적 파동을 기반으로 소리를 구성하고, 이를 VR을 통해 관객에게 체험하게 한다. 이때 균사는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 폭력의 장소를 기억하는 존재로 작동한다. 땅속에서 퍼지는 균사의 네트워크는 폭력의 흔적을 흡수하고, 그것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 현재로 이행시킨다. 이처럼 장소가 간직한 소리는 시각적 정보의 결핍을 오히려 감각적 집중으로 전환시키며, 듣는 자에게 깊은 감응을 일으킨다.이미영은 이 작업을 통해 인간의 말과 증언이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층위에서 폭력의 흔적을 포착하려 한다. 균사의 전기 신호는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소리의 진동으로 변환되며, 이는 VR이라는 몰입적 매체를 통해 청각이 아닌 신체 전체의 감각으로 확장된다. 관객은 ‘보는’ 주체에서 ‘듣는’ 몸이 된다. 또한 작가는 현장에서 채집된 생물학적 요소들이 지닌 생태적 고유성과 지리적 특이성을 존중하며, 폭력을 지역화하는 대신, 장소 특유의 역사성과 생명성을 드러낸다. 이로써 《속삭이는 대지》는 감각적 접촉과 생태적 기록의 사이를 사유하게 하는 복합적인 공간으로 작동한다.

《음소거된 물의 소리: 진동의 걸음》전시 전경 (2024, 제주 산지천갤러리)

제주 산지천갤러리에서 열린 《음소거된 물의 소리: 진동의 걸음》(2024) 전시는 다이아나 밴드, 오로민경, 김그레이스가 참여하여 제주 지하수의 소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숨골, 용암동굴, 대수층을 통과하는 물의 흐름을 현장에서 레코딩함으로써 제주에서 자행된 국가 폭력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감각하도록 유도한다. 특히 오로민경은 “제주의 지난 세대가 경험한 죽음 역시 고요한 밤처럼 우리 발 아래에 우주처럼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감지되지 않은 폭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 전시는 ‘제주와 로힝야’를 연결하는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폭력의 장소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가시적인 고통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로힝야 집단학살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식민통치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폭력으로, 미얀마 군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있다. 지하수의 소리는 이러한 폭력을 ‘자연’이라는 비인간의 기록자로부터 호출하며, 제주와 로힝야라는 두 장소의 폭력 기억을 몽타주한다. 이처럼 작가들이 선택한 비인간적 기록자—흙, 지하수, 균사, 돌 등—는 기존의 인간 중심적 증언 구조와 다른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당사자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말하기를 주저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자연의 소리를 통해 그 고통에 접속할 수 있다. 이는 새로운 형태의 ‘청자성’을 요청하며, 듣는 자의 감각을 통해 억압된 기억이 환기된다. 자연은 중립적인 재현 수단이 아니라, 자체적인 감각성과 시간성을 지닌 존재로서 증언에 참여한다.러한 비인간 존재들의 기록 가능성은 그레이엄 하먼이 주장한 듯 인간의 인식과 무관하게 객체는 고유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며, 그 자체로 세계에 작용한다. 객체는 언제나 자신을 철수(withdraw)하고 있어 완전히 파악되거나 환원될 수 없다. 이 관점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도구적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세계의 역사에 관여한다. 자연의 소리는 인간이 구성한 서사나 역사로 수렴되지 않는 고유한 층위를 가지며, 이질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과거의 폭력을 증언한다.

이러한 사유는 인간이 기록한 역사가 때로는 ‘파라 픽션(parafiction)’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허구적 서사를 통해 진실을 조직하는 장르적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보완한다. 파라 픽션은 정치적·윤리적 의도를 담은 창작의 도구로서 유효할 수 있지만, 동시에 권력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와 허구가 혼재되어 현실의 폭력을 지우거나 탈맥락화할 수 있는 위험도 내포한다. 특히 국가에 의해 조작된 공식 기록이나, 억압된 당사자의 목소리를 대체하는 재현은 ‘허구를 가장한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가장한 허구’가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인간 중심의 역사 기록은 그 자체로 폭력의 은폐 장치가 되기도 한다. 반면, 비인간 객체들은 이러한 서사 기획의 의도를 갖지 않기에 더욱 비의도적이고 조각적인 형태로 진실의 단서들을 남긴다. 자연의 소리는 편집되지 않으며, 정형화된 언어로 환원되지 않고 상처 입은 장소의 기억과 함께 울린다. 이로써 자연은 역사적 파국의 증인이자 진실의 잔향을 간직한 존재가 된다. 하먼이 말한 객체의 철수성과 맞물려 이러한 증언은 인간이 결코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타자성의 실재를 드러낸다. 기억의 문제는 단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자기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적 구조이다. 모두 자연을 객체화하지 않고, 그것의 고유한 존재론적 층위에서 접속할 것을 요청한다. 인간만이 언어의 주체가 아니라면 자연 역시 폭력을 기록하고 발화할 수 있다. 그 발화를 수신하는 감각적 주체가 되기 위해 예술은 기존의 언어, 이미지, 구조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몽타주의 형식을 활용한다.

자연이 기록한 폭력은 실재를 직접 입증하는 증거는 아닐지라도, 존재했던 것, 억압되었던 것, 도래할지도 모를 폭력을 감지하는 징후가 된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는 몸이 되어야 하며, 듣는 자로서 그것을 몽타주하고 다시 재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적 실천은 인간이 아닌 존재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위치를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