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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변방연극제 단편한 글의 일환으로, <암란의 방>을 관람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 몸은 매정하게도 스스로 물리적 상처를 지속적으로 새긴다. 상처가 나고 다시 낫기를 반복한다.
그때마다 상처로 인한 아픔이 내 몸의 일부라는 점에서 끔찍함을 느끼는데,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라 생각이 드니, 어찌할 도리 없이 나는 상처에 약을 꾸역꾸역 넘칠 정도로 발랐다.

살 바깥으로 나온 약, 그리고 약과 상처 사이의 마찰에서 느껴지는 쓰라림은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그런 아픔, 전달될 수 없는 아픔이었다.


목구멍의 구멍
목구멍 속의 어둠과 같은 극장에서 글을 소리내어 읽는 것, 목구멍 안에서 바깥으로. 

아픔은 침묵하는 관객 앞에서 아무런 형상도 없는 목소리로 끄집어내어진다. 

이미 결정된 조건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통이 따른다. 언제든 잊혀질 수 있는 누군가의 아픔과 자신의 아픔을 전달하기 위해 <암란의 방>은 시작되었다. 자신의 고통을 기록하는 사람은 억울하거나 상처입은 사람들일 것이다. 기록된 내용은 어떤 이유에서 읽히지 못할 것이다.  어떤 말은 발화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아픔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구멍과도 같다. 우리의 귓가에 제람과 이랑의 목구멍 바깥으로 나온 목소리가 귓가에 머문다. 사라진다. 

블랙박스와 낭독의 구멍
블랙박스에서 낭독이 시작된다. 나에게 블랙박스는 어두운 공간이 깊게 뚫려 있는 듯 보여 구멍과도 같은 곳이다. 나는 어둠 속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이랑과 제람만을 집중적으로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제람은 암란의 아픔을 전한다. 이랑은 제람의 말을 번역한다. 발화되는 낱말들을 들으며 제람의 표정을 보았다. 제람은 그의 표정 그리고 그 표정 너머에 잔여하는 흔적을 통해 관객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제람의 말은 과거의 시점의 것이지만 제람의 표정은 현재 시점으로 과거를 전달하는 통로이다. 제람으로 인해 암란은 관객과 접촉 가능하게 된다. 

대화를 통해 수집한 기록을 낭독하고 낭독자의 생각을 덧붙인다. 낭독은 텍스트를 실재화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텍스트는 특정 맥락에서 다시 읽힐 수 있다. 낭독은 단순히 과거를 읽는 것이 아니다. 다시 퍼포먼스화되는 과정을 통해 활성화되고 현재화 된다. 낭독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구멍 혹은 과거와 현재가 교환될 수 있는 구멍이다. 극장에서 낭독한 현재의 이야기 안에 혼재하는 복수의 과거가 나선형으로 돌아 제람을 통과하여 다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겹으로 여러 사람의 다른 입으로 다양해지고 단단해진다. 하나의 이야기가 수십개의 형체를 갖는다. 암란은 하나와 나머지 다른 하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교환하고 증식한다. 이처럼 제람의 낭독을 통해 암란이 겪은 사실과 진실이 확장하며 거대하지는 과정을 겪지만 극장에서 발화된 목소리는 남지 않는다. 아픔을 전달하기 위해 시작된 <암란의 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게 기억될 낭독의 방식을 택한 이유는 비물질적인 말하기 방식으로 누군가에의해 고정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암란과 제람과 이랑너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함이지 않을까

대화의 구멍 

제람이 친구와의 대화를 기록한 『암란의 버스/야스민의 나라』가 객석에 놓여있었다. 대화는 서로 다른 세계를 분절된 단어로 이해하는 것이다. 두 세계의 격차를 각자의 언어를 맞대어보면서 고정된 세상을 넘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대화에서 구술자의 이야기는 진짜일수도, 과장될 수도, 강조될 수도 있다. 이야기는 청자로 하여금 또 다르게 다시 이해될 것이다. 예를 들어 대화의 과정에서 우연하게 한 질문으로 인해 같은 이야기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럼 우리가 매일하는 대화는 실상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대화의 불완전함은 주관성에서 비롯된다. 주관적 해석, 주관적 현실에 의해 같은 이야기라도 다르게 읽힐 수 있지만 여전히 실재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상대방에게 전해들은 아픔을 해석할 수 없는 이유는 이야기를 그대로 해석할 수 없도록 구멍이 나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멍을 들여다보기 위해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 

 제람이 말을 하면 이랑이 아랍어로 번역을 한다. 제람과 이랑이 함께 앉아, 자신의 목구멍을 경유해서 서로의 뜻에 최대한 가까운 의미의 문장을 만드는  과정 또한 대화이다. 제람의 생각을 아랍어로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이랑은 제람의 말을 빠르게 잡아두기 위해서 분주하게 손으로 기록했다.  귀와 손과 입으로, 여러 감각기관의 움직임은 제람과 이랑 사이의 시간차를 채우는 듯 보였다. 번역은 원작에서 번역물로 손실 없이 옮겨내는 이랑의 일방향적인 행위가 아니라 번역자의 창조적인 작업인 동시에 제람과 오롯이 대화를 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구멍

암란이 없는 방에서 나는 암란을 떠올렸고, 암란의 가족과 그가 일하는 일터를 상상했다. 제람이 호명한 이름들을 알게 되었다. 모든 낭독이 끝나고 제람과 관객은 포옹했다. 그렇게 어둠에 속에서 수많은 접촉이 일어났다. 구멍은 내게 상상을 자극하는 미지의 공간이다. 구멍은 그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기에 두려움의 대상이되기도 한다. 하지만 구멍은 무한성, 무경계성, 비가시성의 상태이기도 한다. 구멍의 특성을 가진 <암란의 방>은 오히려 난민의 이미지를 우회시키고 가능성의 상태로 남게하며 제람의 대화와 낭독은 여러 다른 입을 거쳐 암란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암란의 방>은 낭독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고 목소 리가 나오는 통로인 목구멍이 내게 이미지로 다가왔다. 

구멍은 대게 뚫려 있는 자리로, 블랙박스 형태인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은 구멍이다. 

방도 마찬가지로 벽을 막아서 만든 거대한 구멍이다.  

관객은 구멍에 앉아서 제람의 목소리를 귀로 듣는다. 

목소리가 들어가는 통로인 귓구멍은 관객의 또 다른 블랙박스이자 방이 될 수 있다. 

어두운 구멍 속에서 교차하는 목소리는 서로를 이끌어주는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된다. 

<암란의 방>은 어둠에서 빛으로 향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는 깊은 구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