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월간미술 큐레이터 보이스 코너에 게재된 글입니다.
≪fe,yi≫ 전시를 준비할 때쯤 보았던 문장,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마지막 공연을 소개하며 글을 연다.
1. ‘날아가기’가 하나의 비상과 또 다른 비상을 즐기면서, 의미의 경찰들을 따돌리면서 두 개의 비상 사이에 행해진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동문선, 2004, 34p
2. 샹탈 아커만의 첫 단편영화인, <Saute ma ville> (1968)에서 서사 없이 흥얼거리는 사운드는 정해진 길을 완벽히 이탈했고, 자신의 존재감을 여한 없이 드러냈다. 자유로운 소리를 들었다.
3. 우연히 8년간 성수동에서 운영되었던 ‘게토얼라이브’의 마지막 공연 <마무리 그리고 변화와 시작> 을 보러 처음 그곳에 방문했다. 게토얼라이브를 이루고 함께 상황을 만들었던 예술가들이 모여 마지막과 시작을 응원하는 즉흥 음악 공연이 펼쳐졌다.
누군가에 의해서도 아니었고, 어딘가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마음껏 발산해 내는 에너지와 감정을 가까이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게토얼라이브가 “떠나는 것, 사라지는 것, 영원히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동시에, 자발적으로 한 명씩 예술을 향한 애정과 생각을 자신감있게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중 나는 ‘자유로운 표현 방식을 향한 지지’와 ‘사명감을 동기로 게토얼라이브를 지금까지 이끈 것’ 그리고 ‘예술은 결론이 없어도 된다’는 말에 다시 한번 예술의 본래 의미를 떠올렸고, 미술을 처음 시작했던 마음과 초심자의 나를 상기했다. 그 곳에서는 모두가 당당했고, 공기는 뜨거우면서도 느슨했다.
하나로 귀결되는 지배적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행위와 기획된 것에 맞추어 정리하고 깎아내고 도려내는 자세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미술은 도저히 정답이 없고, 단일한 방향을 가질 수 없고 그래서 나는 계속 길을 잃고 싶었고 자주 길을 잃었던 것 같다. 전시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고, 잠시 여기 머물 뿐이다. 그래서 전시가 구성되고 작품을 담아내는 과정을 되돌아보고 주목했다. 전시를 만들기 위해 마주했던 여러 갈림길과 수많은 과정과 대화가 증발되지 않고 조금은 머무르길 바랐다.
전시 제목인 ≪fe,yi≫는 ‘fey’와 ‘fei’의 합성어이다. 영단어 ‘fey’는 ‘약간 특이한, 비현실적인’이라는 뜻이다. 또, [fei]로 발음되는 중국어 ‘飞’는 ‘날다’ 라는 뜻을 갖는다. ‘날아가는 것’은 자유로운, 열린 주체, 연속적인 움직임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를 품고 있다. [fei]는 중국어의 4가지 성조 중 평성(1성)으로 숨을 깊게 내뱉어야 하는 긴 단어이다. 제목에도 여러 차례의 이유와 긴 과정을 의도하였다. 서문에서 “전시를 위해 존재했던 과정을 조금씩 쪼개어 드러내고자 했다.” 한 것처럼, 시시콜콜할 수 있지만 우리가 나누었던 형체 없는 대화와 만남을 여기에 기록하고자 한다.
제갈선 작가의 작가 노트는 무척 아름답다. (시간이 된다면 그의 웹사이트에서 작가 노트를 꼭 읽어보시길) 그는 자주 메모하는데, 그의 작품처럼 글도 파편화된 듯한 호흡을 갖고 있다. 글에서는 알 수 없는 어떤 고통과 차가운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베를린에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 7시간씩 뺄셈을 해야 했다. 수첩에 서울의 시간과 베를린의 시간을 적어 계산하곤 했다. 보통 서울시간 오후 5시, 베를린 시간 오전 10시에 만났다.
그의 작업에 대한 궁금증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작품이 주로 푸른빛을 띄는 이유를 물었다.
명확히 지시하는 이유는 없지만 신체의 유한함 너머를 그리고 있기 때문일까. 푸른빛의 물감은 상처 속 붉음과 먼, 죽음과는 거리가 먼 색인 것 같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가 제시하는 ‘대체-신체(txt-body)’로서 텍스트는 화면 안에서 곡선으로 휘어져 있고, 쪼개져 있다. 해체된 정도가 깊어질 수록 텍스트의 의미는 멀어지고, 추상 이미지처럼 변한다. 왜곡된 텍스트처럼 약간 어긋나게 작품을 걸었다.
장도은 작가는 실기실에 처음 만났다. 눈이 내린 추운 겨울이었는데, 그의 자리만 유독 햇빛이 비쳐 인체조각들이 빛났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의 조각은 접합과 재조합이 가능하기에 그 지점을 전시장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이동 가능함을 설명해 주는 짧은 만화형식의 책을 만들까 고민하였는데, 결국 전시는 공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느낄 수 있는 풍경을 만들어 주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그만의 영역을 구상하였다. 높이 약 15cm, 너비 약 5m정도의 넓고 낮은 삼각 좌대를 제작했다. ‘3’은 평면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다각형이 될 수 있는 최솟값이며,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관계가 일어나는 경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의 조각 개념과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낮고 넓은 삼각 좌대는 이전 전시에서 사용되었던 목재를 재사용한 것으로, 쓰임의 지점이 ≪fe,yi≫ 로 이동하였다. 그의 조각은 삼각 좌대 내에서 누군가에 의해 자유롭게 이동되고 해체가능했다.
윤정민 작가의 작업실은 집과 함께 있다. 그의 집에는 유난히 방이 많았는데 그중 거미를 위한 방이 있었다. 거미를 한참이나 관찰했고, 탈피한 허물도 처음 보았다. 그는 거미가 작은 공간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신작 <부딪힌 새 줍기>도 집과 관련이 있는데, 집 창문으로 달려든 직박구리가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고 했다. 그의 손아귀에서 생을 마감한 직박구리가 약 2m 높이를 가진 거대한 조각으로 탄생하였다. 직박구리의 죽음이 작품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니 마음이 이상하다.
우리는 조각이 드로잉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각 5점을 도화지와 같은 흰 벽 가까이에 놓고, 조명을 통해 벽에 그림자가 지게 하였다. 벽을 배경으로 둔 조각과 벽에 드리운 그림자가 모두 드로잉 같이 보였으면 했다. 조각이 놓인 전시장 장면은 그림자가 중첩되며 무대와 같았고 연극적이었다.
문유소 작가 작업실에는 작품이 빼곡히 놓여있다. 크고 작은 작품이 작업실에 있었는데, 작업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빈틈없는 건물들과 중첩됐다. 작품을 살피다 5cm 정도 되는 작은 작품을 보았는데, 그도 오랜만에 작은 작품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작업실을 열어 소개하고 싶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여러 회화 방법론을 탐구하여 지금까지 총 4개의 시리즈를 해냈다. 이번 전시에 시리즈 작품을 모두 소개했는데 그의 행적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어떤 상호 영향을 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매번 전시를 할 수 없을뿐더러 언젠가는 사라지는 전시이기에, 하나의 시리즈만 소개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던 것 같다.
김주현 작가에게 만남을 요청하였을 때 그는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다이브 서울’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었다. 다이브 서울 전시장에 하얀 의자를 놓고 둘러 앉아 작품을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캔버스를 수평으로 눕혀 흘러내기를 수백 번 반복한다는 이야기와 물감이 캔버스 바깥으로 떨어질 때 바닥에 우연하게 생기는 자국도 작품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대화를 통해 그의 작품이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놓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엔 작품을 바닥에 기울여서 놓아야 할까를 고민하였고, 그 다음에는 캔버스 크기에 맞춰 낮은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작품을 눕혀야 할까도 고민하였다. 여러 고민 끝에 드로잉 중 2점<Bark #2>, <Seashore>을 선반에 수평으로 놓았다. 작업 과정이 전시장 디스플레이 방식에도 반영되고, 전시장과 작업 과정이 연결되길 바랐다.
팸플릿도 전시의 연장이라고 생각했고 이번 팸플릿은 다층적이고, 연결되어 있으며, 열려 있길 바랐다. 해독이 어려울 수 있는 중국어 번역을 시도했는데 뜻을 알지 못하더라도 이미지로 읽히길, 하나의 겹으로 바라봐주길 바랐다. 일반적으로 팸플릿을 제작할 때 낱장 종이에 작품 사진이 그대로 인쇄되는 데, 이 방식은 작품을 가두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작품 사진을 별도로 인쇄하여 낱장 종이 위에 붙였고, 언제든 원할 때 작품 사진을 뜯어 낼 수 있도록 하였다. 전시장을 나와서 누군가는 작품 사진을 뜯어내어 다이어리에 꽂아놓거나, 책장 위에 놓기를 바라며 작품이 자유로이 이동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디자이너는 작품 사진을 보고 서문을 읽고 작품과 어울릴 것으로 생각하는 종이를 선별해 주었다. 각 작가의 작품 사진마다 종이 질감을 달리 하였는데, 이는 작품에 개별성을 더욱 돋아주었던 섬세한 작업이었다. 전시 제목이 갖는 여러 뜻 중 “날다”의 이미지와 같이 마치 날갯짓을 하듯 누군가의 손에 머물길 바랐기 때문에 얇은 종이를 선택했다.
전시는 이처럼 겹겹이 쌓여서, 전체가 된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내 방 책상에 앉아 곰곰이 전시와 관련된 과거를 돌이켰다. 현재와 과거가 머릿속에 중첩되며 다중적인 시간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을 스케치하듯 적었다. 혹여 기억하지 못할까하는 마음에 전시를 준비했을 때와 오픈했을 때를 자주 회상했다. 전시는 끝났지만 이번 글에서 복원된 기억은 여러 시간대를 포용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형태의 교점-글과 전시-을 지나 ≪fe,yi≫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